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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On 진주성 전투 승자와 패자의 기록 다큐온 내레이션 장희문 조선과 일본이 기록한 두 차례 진주성 전투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조선의 징비록 미리보기

by 피린8 202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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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On 미리보기

 

진주성 전투, 승자와 패자의 기록

 

■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에 대한 기록

 

430년 전 발발한 임진왜란, 그 7년의 전란 중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두차례의 격전이

벌어졌던 진주성. 한번은 ‘진주대첩’으로 명명된

조선의 승리, 또 한번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

참혹한 보복전이었다. 진주시는 진주대첩

기념일을 진주시민의 날로 삼아 해마다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다.

끔찍한 전란의 역사가 시작된

일본 큐슈 가라쓰에 위치한 나고야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이 남아있는 이곳

박물관에는 <태합기>와 <회본태합기> 등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측 기록물들이 보관돼 있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물리치는 장면이에요

일본군이 고전했다고 돼 있어요”

-나고야성 학예사의 <회본태합기>에 대한 인터뷰

 

“임진왜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쿠슈의

나고야성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상황,

조선에서의 평양성전투 진주성전투 울산전투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일본에 방문했던 것,

정유재란 등에 대한 것을 기록을 해 둔,

일본에서 최초로 임진왜란을 정리한 책이라

할 수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최관 교수의 <태합기>에 관한 인터뷰

 

<태합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며 <회본태합기>는 태합기에 삽화를

그려넣은 책이었다. 일본은 이 책들 속에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참혹했던 전쟁의 기록,

그 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예고 영상 

 

http://

 

■ 조선과 일본이 기록한 두 차례 진주성 전투

 

난중잡록(조경남,1610)

회본태합기(다케우치 가쿠사이,1802)

 

1592년 10월과 이듬해 1593년 6월,

조선과 일본은 진주성을 둘러싸고 두차례

격전을 벌였다. 1차 전투는 진주대첩으로

조선의 승리였으며 2차 전투는 일본의 승전이었다.

 

일본의 <태합기>와 조선의 <난중잡록>은

모두 두 차례 진주성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투가 벌어진 배경, 전개과정과 결과까지

양측의 기록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다.

특히 진주대첩의 주역 김시민과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기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투의 이면을 밝혀주고 있다.

 

“일본이 나쁜 짓을 했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서 (김시민)이 우리를 공격해 온다는

공포감을 느끼고 그런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일본학자의 김시민에 대한 인터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라이벌이에요

유키나가는 단순히 무장이 아니라

일종의 외교관 역할을 했고

중국 측의 사절과 외교 교섭을 했어요. 그

런데 기요마사는 더 싸우겠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주성)전투에서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일본학자의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인터뷰

 

진주성 전투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은 일본의

전통연극인 가부끼의 주인공으로로 등장할만큼

충격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조선의 <징비록>

 

조선징비록(야마토야 이헤에,1695)

 

토요토미 히데요시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임진왜란에 대한

언급과 기록을 철저하게 금기시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종전 100여 년 후 조선통신사에 의해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당시 일본 출판업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30여 종 이상의 <징비록>이 번역 출간되는 등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선풍적인 인기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주요 고서점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간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조선의 <징비록>은

여전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실상을 알고 싶어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지적 호기심이 그 이유였다.

 

“징비록은 1695년 일본에서

처음 번역본이 나오고 난 뒤에 에도시대 중기에는

일본사회에 광범위하게 읽혀지면서

일본의 학자들뿐만 아니고 일반인들도

징비록의 내용을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백 년간 베스트샐러 스테디셀러로

일본인들에게 환영받고 존경받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종각의 인터뷰(<일본인과 징비록>저자)

 

<징비록>의 흥행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다양한 기록물들의 출판이 이어졌으며

그 내용 또한 풍부해졌다. 심지어 삽화가

그려진 책까지 출간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런데,

이렇게 임진왜란 관련 기록물들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이면에는 일본 사회의 또다른 욕구가

숨겨져 있었다.

 

■ 전쟁기록 속 승패에 대한 엇갈린 시선,

역사의 방향을 바꾸다

 

임진왜란 기록물에 열광한 일본사회, 근대로

오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물에 일본 대중의

관심은 더 다양해졌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까지 더해졌다. 그의 실패를

교훈삼아 못다 이룬 조선 정벌의 야욕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에 대한 국가 공식 기록과

민간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남긴 기록들은 다시는 전쟁의 참화을

겪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민족주의가 탄생한 시기인 19세기부터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요

히데요시와 기요마사가 높이 평가되며

신처럼 불리며 신이 옳은 전쟁을 한 것이라는 의미죠

일본군의 용맹함 또는 일본의 전쟁 정당화 등에

이용한 것이 틀림없어요”

-이노우에 교수의 인터뷰

 

“조선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 추구의 정신이 담겨 있었고

그리고 그 정신의 기본은 다시는

이와같은 전란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 들어있었다도 생각합니다.”

-최관 소장의 인터뷰(한국동아시아연구소)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의 기록과 관심은

훗날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론적 사상적 기반으로 자라났다.

임진왜란 이후 두 나라가 전쟁을 기록하는

시각과 그 기록을 활용한 방식은 서로 달랐고,

그것은 결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었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부단히 현재 또는 미래의 그 누군가에 의해

소환되며 새로운 현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방송일시 : 2022년 11월 6일 (일) 23:20 KBS 1TV

■ 프로듀서 : 최용수

■ 연출 : 김달해 / 작가 : 윤영수

■ 내레이션 : 장희문

■ 제작사 : 미디어천지인

 

 

[출처] kbs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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