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On 미리보기

 

3.1운동기념- 미리사, 운명의 개척자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 ~ 1955)

 

130여년 전 제대로 된 이름하나 없이

그저 ‘섭섭이’라 불리던 여자 아이는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갔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라”

 

시대의 굴레와 억압을 벗어던진

여성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선각자 !

차미리사 그녀를 만나다.

 

100년전 여성들만으로 조직된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대장정

84일, 67개 마을, 만리대장정...

조선의 여성들을 사로잡다

 

 

 

 

1921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못배우고

괄시받던 조선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조선여자교육회’의 ‘전조선순회강연단’의

강연은 마치 100년 전 지식콘서트와 같았다.

음악과 강연으로 빈틈없이 잘 짜인 한편의

종합문화공연을 선보인 이 강연은 여자들만으로

구성, 무려 84일간 67개 고을을 방문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

강연단의 일정은 민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당시 신문에 거의 전 일정이 대서특필 될 정도로

여성들은 물론 전조선이 주목할만큼 성공적이었다.

 

순회강연단을 이끈 여성이 바로 차미리사 !

강연단을 진두지휘하고 청중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멋들어지게 영어 노래를 부르던 사람,

역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미리사’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사실 100년전, 당대의 셀럽이었다.

 

차미리사선생이 이끈 조선여자교육회의

순회 강연회는 전국 수만명의 여성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바로

한국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약 천여명이

모여들었던 해주에서의 강연,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가는 차미리사에게 크게 영향받은

최은희기자는 훗날 차미리사 사후 평전을

집필하고 이를 위해 차미리사의 마지막을

육성으로 녹음했다. 방송에서는 차미리사 선생의

마지막 육성 녹음을 통해 그녀의 살아있는

의지와 열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3.1정신으로 창학한 근화여학교,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 참가

 

전국을 돌며 여성들의 생활 개조, 신문화,

신사상을 전파한 조선여자교육회는 후일

‘근화여학교’로 발전했다. 덕성여고와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특히 강조하며 실용적 교육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운동가와

독립운동가를 낳으며 근대 여성인재 배출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근화여학교는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에 3학년을 

제외한 153명 전원이 참가했고 이중 21명에게는

2019년 독립유공자 훈장이 추서되었는데

그 뒤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도전의식을

강조한 차미리사 선생이 있었다.

 

우리나라 1세대 대표 신여성 ‘미리사’

미국 유학, 미주 한인 여성 지도자로 떠오르다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 중국을 거쳐

미국 유학에 도착한 차미리사는 망국의

위기 앞에 학업보다는 교육운동, 사회사업,

국권회복운동 등에 치중했다. 미주지역

애국지사들과 함께 항일단체인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에 적극 참여했다. 19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부인회를 창립,

회장을 맡았다. 한국부인회는 최초의

재미 한인여성단체였다. 미리사는 어느덧

재미 한인사회의 여성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본 다큐에서는

*‘조선여자교육회’에서부터 ‘근화여학교’까지

차미리사 선생이 이끈 근대 여성교육의 현장을

발굴, 생생하게 재연한다 *격변의 20세기초,

미리사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을 추적한다.

*한국 최초 여기자인 최은희기자가 녹음한

‘차미리사의 생전 육성’을 최초 공개 !

 

이 프로그램은 3.1운동을 필두로 한

국권회복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차미리사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통해

‘여성 자각’과 ‘여성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암울했던 억압의 시기,

시대의 선구자이자 혁신가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던 차미리사 선생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와 자극을 주는 동시에

국권회복의 역사를 ‘여성자각과 교육’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

기억과 기록의 복원

 

3.1운동 시기 수많은 여성들의 목숨을 건 참여와

희생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록과 평가는 언제나

남성 중심이었다. 여성의 각성과 교육이

국권 회복의 동력이 됨을 깨달은

차미리사 선생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이후 근화여학교를

설립, 근대적 여성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평생을 여성 교육과 여성 독립에 바친 선생의

삶은, 아쉽게도 선생이 남긴 민족적 역사적

유산에 비해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도

2002년으로 적잖이 뒤늦은 감이 있다.

 

뮤지컬 디바, 명성황후와 팬텀의 김소현,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 ‘화자’로

100년 전 여성 ‘차미리사’를 만나다

 

명성황후, 팬텀 등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 배우 김소현이 100년 전

차미리사를 만난다. 차미리사는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왜 여성교육, 여성독립의 길로

나갔을까. 무엇이 암흑과 절망 속에서

그녀에게 용기를 준 것일까. 2021년을 살아가는

여성이 100년 전 차미리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20세기 초의 신여성 차미리사의 삶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차미리사는 누구인가

1879. 8.21 서울 아현동 출생

17세에 출가, 3년 만에 남편과 사별

기독교에 귀의, 세례명 ‘미리사’

1901. 중국으로 유학

1905. 미국으로 건너가 대동교육회 발기인 참여

1907. 항일독립단체 대동보국회 발기인

1910. 미주리주 스캐리트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

1912. 귀국.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

1920. 조선여자교육회 조직, 부인야학강습소 설치

1921. 조선여자강연단 전국순회 강연

1925. 근화여학교 설립

1935.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변경

1955. 6. 1. 사망 (향년 77세)

2002.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차미리사가 걸어온 길>

 

차미리사 선생은 1879년 8월 21일

서울 아현동에서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의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다.

 

차미리사 선생은 스물 셋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901). 이때 남겨두고 온

어린 딸과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외국어를

배우며 고학하느라 심신이 지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1905),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1907).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

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 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성경학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1910).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귀국하였다(1912).

조국을 떠난 지 10여 년만으로

그의 나이 서른 네 살 되는 해였다.

 

귀국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교육을

하던 차미리사 선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1920). 이는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립적(自立的)·자생적(自生的)·

자각적(自覺的)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주 교육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적령기

학생들이 아니라 여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이었다.

차미리사는 선생은 순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순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낡은 사상 타파, 생활 개조,

여성 교육, 여성 해방, 남녀평등, 신문화 신사상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하였다(1921). 그리고

전국순회강연회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부인야학강습소의 이름을

근화학원(槿花學園)이라 하였다(1923).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운동을 벌인 결과로 세운

근화학원은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체였다. 이후 근화학원은 근화여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25), 다시 재단법인

근화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1934),

산하에 근화여자실업학교를 개교하였다.(1935)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근화를 덕성으로

개명하였다(1938).

 

1930년 대 후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제는 차미리사가 민족사상을

품은 교육자라는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학생들의 머릿속에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기에 열중인 차미리사에게

교장 자리에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교장직을 박탈하려 한 것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1940.8). 그의 나이 62세

되는 해였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차미리사 선생의 열정은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차미리사 선생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였다(1948).

일생을 민족의 예속과 분단에 맞서 민족 해방과

민족 통일을 위해 노력한 차미리사 선생은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차미리사 선생 사후 47년 만인 2002년,

정부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포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미리사 여사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하였고,

귀국하여 배화학교 사감으로 3.1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역설하였고,

1923년 근화학원(槿花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났다.

 

◎ 방송일정 : 2021년 3월 5일 금요일 밤 10시 50분

◎ 책임프로듀서 : 손종호, 프로듀서 송철훈

◎ 연출: 한선옥, 이규철 작가: 신지현

◎ 제 작 사 : 콘텐츠핏

 

[출처] kbs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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